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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론

성혜영 | 2016.08.10 06:11 | 조회 617

 

-신영복

-돌베게

-2016년 3월 23일

   신영복 선생님의 책은 가벼이 읽으면 안 되는 책임감이 든다. 마음속 깊이 새겨서 읽고 싶다. 그의 마지막 책 담론은 주변 지인들에게 일독을 권하고 싶은 최고의 책이다.

   여러 가지 사정으로 이번학기를 마지막으로 더 이상 강의를 하지 못합니다. 나의 강의를 수강하려는 학생들에게 미안합니다. 그래서 강의대신 책을 내놓기로 했습니다. 이 책을 이미 출간된 책과 발표된 글을 교재로 강의한 것이기 때문에 자연히 중복되는 내용이 많습니다. 양해바랍니다. <책을 내면서>

   사람을 키우는 일이야말로 그 사회를 인간적인 사회로 만드는 일입니다. 사람은 다른 가치의 하위 개념이 아닙니다. 사람이 ‘끝’입니다. 절망과 역경을 ‘사람’을 키워내는 것으로 극복하는 것, 이것이 석과불식의 교훈입니다. 최고의 인문학이 아닐 수 없습니다. 욕망과 소유의 거품, 성장에 대한 환상을 청산하고, 우리의 삶을 그 근본에서 지탱하는 정치, 경제, 문화의 뼈대를 튼튼히 하고 사람을 키우는 일, 이것이 석과불식의 교훈이고 희망의 언어입니다. <표지글 중>

 

 

-양복과 재봉틀

   그러나 장자가 전개하는 반기 계론은 그 기사 때문에 ‘기심’이 생긴다는 것입니다. 좀 더 쉽게 하려는 마음이 생긴다는 것입니다. 마음속에 이러한 기심이 생기면 순수한 마음이 없어집니다. <중략>

발전한 자본주의 국가일수록 자동화, 기계화, 인공지능화 때문에 생기는 실업 문제가 갈수록 더 심각합니다. 실업하거나 비정규직화합니다. 노동조건이 더욱 열악해지고 있습니다. 기계파괴 운동은 물론 실패로 끝났습니다. 러다이트 운동은 잘못된 운동으로 정리됩니다. 기계는 아무 죄가 없고, 기계의 자본주의적 채용방식에 문제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10시간 걸리던 일을 기계를 사용해 1시간에 끝낼 수 있게 되면, 노동 경감으로 이어져야 하는데 아홉 사람의 해고로 이어지는 것이 문제라는 결론입니다. <중략>

 

   자본주의의 역사는 자본축적의 역사입니다. 자본축적은 자본주의 강제법칙입니다. 자본축적은 필연적으로 기계의 채용으로 나타납니다. ‘자본의 유기적 구성’이라는 개념이 있습니다. 이것은 노동과 기계의 비율이라고 생각하면 됩니다. 노동에 비해 고정자본의 비율이 점점 높아집니다. 생산과정에서 기계의 비율이 높아지면 자연히 노동이 배제됩니다. 한사람이 10만 명을 먹여 살리는 환상을 보여주면서 꿈의 신기술이 예찬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현재와 같은 구조라면 한 사람만 고용되면 10만 명이 해고됩니다. 그 한 사람의 노동을 로봇이 수행한다면 그리고 그 로봇이 시장에서 물건을 구입하지 않는다면 자본주의 경제 시스템은 정지됩니다. 이것은 장자의 문제의식과는 다른 것이지만 생산 효울성이 높아질수록 생산에 참여하는 고용소득의 분배만으로는 경제가 돌아가지 못하게 됩니다. 사실은 이 문제가 오늘날의 당면 과제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계에 대한 신화는 변함없습니다. 장자의 문제의식을 여기까지 연장해서 읽어야 합니다만 일단 장자 텍스트에 국한해서 읽고 여러분에게 장자의 화두를 던지는 것으로 하겠습니다.

 

 

-푸른 보리밭

   [청구회의 추억]을 함께 읽으면서 느끼는 감회가 새롭습니다. 우리가 추억을 불러오는 이유는 아름다움 추억하나가 안겨주는 위로와 정화 때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청구회 추억]과 함께 여러분과 공유하고 싶은 이야기는 이처럼 작은 추억의 따뜻함에 관한 것입니다. 우리가 작은 추억에 인색하지 말아야 하는 까닭은 추억은 아무리 작은 것이라 하더라도 뜻밖의 밤길에서 만나 다정한 길동무가 되어 주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추억은 과거로의 여행이 아닙니다. 같은 추억이라도 늘 새롭게 만나고 있는 것이 우리의 삶이기 때문입니다. (P. 219)

 

 

-사일이와 공일이

   무엇보다 내가 갇혀 있던 근대적 인식 틀은 완고했습니다. 재소자는 기본적으로 룸펜프로라는 선입관을 버리지 못했을 뿐 아니라 동료 재소자들을 대상화하고 분석하고 있었습니다. 죄명, 형기, 학력, 결손가정(?)…하나하나 분석하는 습관을 버리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겉으로는 내색하지 않고 친절하고 지냈습니다. 나중에 알게 되지만 상대방들은 다 알고 있었습니다. 내가 자기들을 그런 과점에서 분석대상으로 삼고 있다는 것을 다 꿰뚫어 보고 있었습니다. 뿐만 아니었습니다. 나는 사회에서 자기들을 업신여기는 사람들의 부류에 속하는 사람으로 분류되고 있었습니다. 여러 가지 면에서 나는 나만 모르는 ‘왕따’였습니다. 왕따 기간이 5년쯤 되지 않았나 생각됩니다. 그 5년 이란 기간이 정확하게는 내 생각이 변화하는데 필요한 기간이었습니다. 왕따는 내가 변화함으로써 벗어나게 됩니다. 내가 변화한다는 것이 바로 동료 재소자들의 경험을 목발로 삼아 서툰 걸음을 시작하는 것이었습니다. 교도서 재소자들의 삶은 어느 것 하나 참담하지 않은 것이 없었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의 눈물겨운 인생사가 나를 적시고 지나갑니다. 나도 저 사람과 똑같은 부모 만나서 그런 인생을 겪어 왔다면 지금 똑 같은 죄명과 형기를 달고 앉아 있을 수밖에 없겠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생다리가 목발을 닮아 가는 과정이며 나 자신의 변화이기도 했습니다.

담담하기 짝이 없는 억지 주장을 펴는 사람도 있고, 사회의 최말단에 밀려나 있는 자기의 처와는 반대로 지극히 보수적인 발언ㅇ르 서슴지 않는 사람도 많습니다. 심지어는 나를 두고도 “사람은 좋은데 사상이 나쁘다”는 결론을 내리기도 합니다. 나는 그 점을 극히 경계했습니다. 우선 그 사람의 인생사를 알고 있는 경우에는 충분히 이해가 갑니다. 그 사람의 인생사를 알고 있는 경우에는 충분히 이해가 갑니다. 그 사람의 생각은 그가 살아온 삶의 역사적(?) 결론이기 때문입니다. 역사를 다시 쓸 수 없듯이 그 사람의 생각에 관여할 수 없습니다. 반면에 나 자신의 생각 역시 옳다는 보장이 없습니다. 수많은 삶 중의 하나에 불과합니다. 다른 사람의 의견을 승인하고 존중하는 정서를 키워가게 됩니다. 이 과정이 서서히 왕따를 벗어나는 과정이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머리에서 가슴까지의 여행’이었습니다. ‘머리에서 가슴까지의 여행’은 참으로 먼 여정이었습니다. 이 여정은 나 자신의 변화였고 그만큼 나에게 성취감을 안겨 주기도 했습니다. 당시에는 가슴까지의 여행이 최고점이고 종착점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톨레랑스’ 프랑스의 자부심이이며 근대사회가 도달한 최고의 윤리성이 바로 관용이기도 합니다. 나 스스로도 이러한 정서에 도달하기까지의 우여곡절이 대견하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나의 목발이 되어 먼 길을 함께 해 온 수많은 사람들의 이야기가 강물 같았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감회도 오래지 않아 무너지기 시작합니다. 결론을 미리 이야기 하자면 ‘가슴’이 최종 목적지가 아니었습니다. 또 하나의 멀고 먼 여정을 남겨 두고 있습니다. 바로 ‘가슴에서 발까지의 여행’입니다. ‘가슴’이 공감과 애정이라면 ‘발’은 변화입니다. 삶의 현장을 만들어 내는 것입니다.

<중략>

 

  그 이야기에 이어서 왕년 목수 시절의 이야기를 시작하면서 집을 그렸습니다. 땅바닥에 나무 꼬챙이로 아무렇게나 그린 집 그림을 보고 놀랐습니다. 노인 목수의 문도득은 추춧돌 부터 시작해서 지붕을 맨 나중에 그렸습니다. 엄청난 충격이었습니다. ‘일 하는 사람은 집 그리는 순서와 집짓는 순서가 같구나. 그런데 책을 통해서 생각을 키어온 나는 지붕부터 그리고 있구나.’

내가 이 이야기를 소개하는 이유는 톨레랑스와 관용을 다시 생각하자는 것입니다. 만약 노인 목수의 집 그림을 앞에 두고 내가 이렇게 말했다면 어떨까요? “좋습니다. 당신은 주춧돌부터 그리세요. 나는 지붕부터 그립니다. 우리 서로 차이를 존중하고 공존합시다.” 이것이 톨레랑스의 실상입니다. 차이를 존중하고 다양성을 승인하는 것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근대사회의 최고수준을 보여줍니다. 그러나 차이와 다양성은 그것을 존중하는 것으로 끝나서는 안 됩니다. 그것은 새로운 시작이어야 합니다. 나는 그 집 그림 앞에 앉아서 나 자신의 변화를 결심합니다. 창백한 관념성을 청산하고 건강한 노동 품성을 키워 가리라는 결심을 합니다. 차이는 자기 변화로 이어지고 또 하나의 출발이어야 합니다. 차이는 공존의 대상이 아니라 감사의 대상이어야 하고, 학습의 교본이어야 하고, 변화의 시작이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유목주의입니다. 들뢰조, 가타리의 노마디즘입니다. (P. 228~2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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