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7월 1일
-김민웅 지음
-이봄
-네번째 이야기 인어공주
사랑을 약속한 남자에게 헌신하는 여자
인어공주는 왕자가 해안가에서 보았다고 기억하고 있는 그녀의 대체물입니다. 인어공주 자신으로는 왕자에게 받아들여지지 않을 것입니다. 왕자는 자기 목숨을 구해준 이가 누군지 알지 못했으니 성전의 소녀가 바로 그녀라고 여길 수 있지요. 그렇다 하더라도 인어공주의 눈이 말하는 진실을 알아보지 못합니다. 목소리가 아닌 눈으로 말하는 것을 듣지 못하는건 이렇게 비극적입니다.
그런데 왕자는 인어공주에 대한 사랑을 고백하면서 결코 헤어지지 말자고 합니다. 참 모순 아닙니까? 자신이 사랑 할 수 있는 여인은 해안가 성전에서 본 여인 하나 뿐이라면서 인어공주에게 사랑을 고백하고, 그렇다고 왕자비로 맞이할 생각도 없으면서 언제까지나 같이 하자고 합니다.
이 왕자, 그래서 어쩌자는 건가요? 인어공주는 정작 자신이 목숨을 구해준 당사자인 것을 모르는 왕자를 생각하면서 깊은 한숨을 쉽니다. 그러나 속으로 그때 보았던 아가씨는 성전에 속해 있으니 영원히 그곳을 떠날 수 없다고 여기며 안심하지요. 여기서 '성전에 속해 있다.'는 것은 그 아가씨가 서원을 해서 성전에 수녀나 수도자로 평생을 사는 경우를 의미합니다. 인어공주는 이렇게 마음먹습니다.
" 지금 왕자님과 함께 있는 건 바로 나다. 나는 그를 매일 보지 않는가? 내가 그를 돌고보 사랑하고 그에게 내 인생을 바 칠 거야." (P. 166)
<중략>
왕자의 선택은 이제 확고해졌습니다.
왕자는 얼굴을 붉힌 신붓감을 그의 팔 안에 껴 안았습니다.
" 아, 나는 너무나 기뻐!"
그는 인어공주에게 말했습니다.
"내가 그토록 바라던 일이 이루어졌어요. 당신은 이 세상 그 누구보다 나를 사랑하니 나의 이 기쁨을 함께 나누어요."
인어공주는 왕자의 손에 키스를 했습니다.
인어공주의 키스는 축하가 아니라, 상황에 떠밀려 어쩔 수 없이 표하는 예의인 거죠. 인어공주에게는 참으로 잔혹한 순간 아닌가요? 왕자의 그 굳세보이던 맹세는 순식간에 애초부터 없었던 것이 되어 버립니다. 인어공주를 이 세상 그 누구보다 사랑한다면서 애정표현까지 적극적으로 했던 바로 그가,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그 사랑을 배반한 거예요. 왕자에게 인어공주는 대체욕망의 대상일 뿐이었음을 입증 된 것입니다. 즈것도 자기에 대한 인어공주의 사랑까지 들먹이면서 말이지요.(P. 172)
<중략>
아침 햇살이 점차 밝게 퍼지고 있었습니다.
인어공주는 언니들에게서 받은 그 칼을 저 멀리 바닷속으로 던졌습니다. 그러자 파도가 핏빛으로 붉게 물들었어요. 인어공주는 이제 마지막으로 왕자를 쳐다 보았습니다. 가눌 길 없는 슬픔에 잠긴 인어공주의 눈은 반쯤 흐릿한 상태가 되고 있었어요. 인어공주는 배에서 바다로 풍덩 몸을 던졌습니다. 그러자 몸이 어느새 물거품처럼 녹아드는 것을 느꼈습니다. (P. 178)